그러니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올 수는 없어.
아직 어린 것아, 눈을 감고 잠들어라.
환상이라도 좋다면 내 기꺼이 잠시 머물다 갈 테니.
"―신무영."
세계의 붕괴가 멈췄다. 세상이 더는 무너지지 않는 건지 시간이 멈춘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머리 꼭대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신무영이 아는 모든 세계가 무너진다 해도 계속 듣고 싶은 것이어서, 신무영은 오히려 이대로 발끝이 무너져 영원한 결말을 맞는다 해도 기꺼이 순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한편으론 그것을 바라기까지 했다. 신무영은 눈을 꾹 감고 그가 서 있던 길이 영영 무너져 버리길 기다렸다.
"검은 것,"
혹시 안 들리나? 저기, 날 마주치면 죽는 악몽이나 유령 같은 걸로 취급하는 건 아니지? 나 멀쩡해. 아, 너도 알다시피 죽긴 했지만. 그래도 사지랑 눈까지도 멀쩡하게 붙어 있는데. 안 그랬으면 네 앞에 나올 생각도 못 해. 누구 진짜 죽일 일 있나. 난 누구처럼 다른 사람 괴로워하는 거 구경하고 그런 건 취향이 아니라. 근데 설마 안 들리는 건 아니지? 너 다 들리는데 무시하는 거면 진짜 나빴다. 응? 검은 것, 나 좀 봐주라. 눈만 뜨면 바로인데 왜 그걸 안 해―
신무영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뜬다. 그리고 새파란 시선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다. 꿈에서라도 만나길 기도했던 것치곤 당황스러운 모습이라 우습게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게 마치 거울을 사이에 둔 듯 거꾸로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신무영이 발을 딛고 있는 바닥의 맞은편 하늘이 곧 은율이 앉아 있는 담벼락의 바닥과 같았다는 뜻이다. 지극히 신무영의 시선에서 생각했을 때 어지럽지도 않은지 은율은 흰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다. 드디어 봐주는구만, 안녕, 오랜만.
"너 어떻게 여기 있어."
"그냥 있는 거지 뭐. 근데 안 올라와? 계속 거꾸로 서 있게?"
"내 쪽에선 네가 거꾸로 앉아 있는 거거든."
"낸들 모르겠냐? 그냥 잔말 말고 올라와."
몇 년 만에 보는데 백팔십 도로 돌아간 얼굴보단 멀쩡한 게 보고 싶거든. 기억 속 그때와 똑같은 웃음으로 은율이 씩 웃었다. 끌어올려-혹은 끌어내려-주겠다는 듯이 내민 손엔 생기가 돌아서 신무영은 그 손을 잡기가 두렵기까지 했다. 신무영, 나 어디 안 가. 그 말에 무심코 손을 뻗자 은율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끌어당겼다. 무너지려는 세계를 넘어 무너지는 순간에 멈춘 세상으로. 신무영은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것 같은 익숙한 감각을 느끼며 하늘과 하늘 사이를 넘었다. 무영의 발이 다시 바닥에 닿자 은율은 잡은 손을 놓았는데, 그 자신은 여전히 담 위에 앉아 있던 까닭에 신무영이 은율을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야, 이거 좋다. 너를 내려다보는 건 또 흔치 않은 일인데, 그치? 은율은 마냥 장난스럽게 말을 던진다. 그게 퍽 안심이 되어서 신무영도 피식 웃고 말았다.
올라와. 달이 떴어. 은율은 그 새파란 눈으로 잠시 가만히 신무영을 바라보다가, 장난기가 조금 지워진 얼굴로 다시 한번 말했다. 고개를 올리자 푸르스름한 흰빛 달이 뜬 게 보였다. 여전히 담벼락은 잿빛이었고 길은 그게 노란색인지 사실 빨간색인지 알 수 없었지만 까만 하늘에는 파란 달이 뜬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져서 신무영은 좀 전에 웃었던 것도 잊고 다시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너는 저 달이 지면 또다시 사라지겠지. 그렇지?
은율은 작은 한숨을 푹 내쉬며 뒤로 달이 뜨는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무영의 앞에 섰다.
"저 달은 금방 질 거야."
"너... 진짜기는 해?"
"참 일찍도 묻는다. 진짜야. 이건 네 꿈이고."
"진짜면 안 갈 수는 없고?"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 그랬지."
하지만 검은 것, 신무영,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잖아. 은율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가. 죽은 자의 시간은 늘 끝이 있으니……
……신무영은 마치 물 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다 겨우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처럼 큰 숨을 들이키며 잠에서 깼다. 악몽을 꾼 것도 아닌데 언젠가부터 종종 그랬다. 자는 동안 무의식중에 호흡을 멈추기라도 하는 건지 잠에서 깨는 순간이면 참았던 숨을 몰아 쉬곤 했다. 가끔 찾아오는 새하에게 묻기도 물어봤으나 딱히 속시원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신무영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새 악몽이라도 꾸나 싶었다. 악몽?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데. 어쩌면 조금 푸르게 희었던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