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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 loved me, shoot me

Yraunaj 2021. 3. 15. 03:56

포타가 발행취소를 갈겨서 옮기는 연화나린연화 느와르 조각.

(ㅁㅁ님 썰은 이쪽으로-> http://posty.pe/11m9j6

(노래 가사는... 어떻게 보면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연화야.
-네, 언니.


후희, 그리고 후회. 연화는 소리 없이 입안에서 단어들을 굴렸다. 딱 한 글자 차이가 얼마나 클 수 있는지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 집요하게 사랑을 속삭이며 서로를 끌어안던 밤의 후희는 얼마나 달았고 또 스스로 자처하여 후회로 물든 이 사랑의 끝은 얼마나 씁쓸한가. 모르는 새에 조소가 입가에 맴돌았다. 지독한 운명. 자신을 향한 비난이 숨을 쉴 때마다 쏟아질 것 같지만 기를 쓰고 버틴다. 웃어. 연화야. 웃어. 그리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이며 생긋 미소 짓는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불안하지 않은 것처럼,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가볍게 뒷짐을 진 채로,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활짝. 여느 때처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가면을 쓰고, 그냥 그렇게.


-너... 왜 내 밑으로 들어온 거야?
-음. 언니가 좋아서요?
-연화야.
-네, 말씀하세요, 언니.
-나 이번에는 장난하는 거 아니야.


감정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은 애처로운 목소리에 소식이 그녀의 귀까지 들어갔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간신히 끌어올렸던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미안해요. 속으로는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외친 말이지만 입 밖으로 내뱉기는 싫어서 이를 악문 까닭에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이어진다. 빗소리만 아득하게 들려와서 더 처량하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움켜쥘 요량으로 예쁘게 웃으며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다. 장난이요? 무슨 말씀이세요? 명랑하고 차분하고 비에 젖은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넘어간다.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듯한 거짓말이 귓가에 가닿는다. 그녀가 눈을 천천히 감자 특이한 보라색 속눈썹이 하강하고, 그녀가 눈을 천천히 뜨자 자수정처럼 처연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반짝인다. 연화는 깨닫는다. 사실 희망은 개소리고, 마지막을 직감한 만큼 웃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네가 배신자였니?


미안. 정말 미안해요. 당신을 배신해서 미안하고 당신을 사랑해서 미안해요.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어서 차라리 침묵을 지키기를 택했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후회, 그리고 아득한 빗소리에 씻겨내려가고 있는 사랑의 후희. 지독하게도 달고 더럽게도 쓴 침묵은 긍정의 답이 되어 하나린의 가슴에 박혔다. 연화는 눈을 감았다. 하나린은 자신이 배신자임을 알아챘음에도 불구하고 권총 하나 가져오지 않았다. 망할 내 사랑. 아, 물론 이미 시작부터 망했지만. 내 사랑, 어째서 나를 믿어요.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한 조직의 보스를 죽이고 탈출할 수도 있다. 그렇게만 하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물론 상당한 보상을 받아 호기롭게 살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연화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었다. 한 사람을 배신하고 한 사람을 살리고 한 사람을 사랑한 대가로 죽을 것이었다. 그래. 죽는다. 비가 오는 날, 후회의 후희를 음미하며 죽는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기까지는 단 몇 분, 연화는 망설임 없이 총을 꺼내 장전했다.


-...끝까지 몰랐으면 했는데. 당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 모르길 바랐는데. 알아버리셨네요.


입꼬리를 끌어당겨 내리고, 이를 악물어 포커페이스. 나른하게 올려다보는 초록색 시선에 더 이상 명랑함이라고는 없다. 억지로 연기하는 배신자의 얼굴. 자. 연화야. 가면을 쓰렴. 이제껏 해왔잖아. 가면의 색이 달라졌을 뿐이지 네가 가면을 벗은 건 아니니까. 자신의 눈 바로 앞에서 총알을 장전하는 연화의 모습을 하나린은 담담하게 지켜본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무표정은 미묘하게 이질적인지라 하나린은 더욱 비참해진다. 내 사랑.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너는 여기 안 어울려. 차오르는 눈물이 기어이 시야를 가리듯이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고 당장이라도 도망가서 종적을 감추고 싶은 마음이 자꾸 간절해진다.


-연화야.
-네, 말씀하세요, 나의 보스.
-지금 나랑 도망갈까.


그 말을 듣고 연화는 웃음을 터트렸다. 슬퍼서 웃었다. 실컷 웃어제꼈다. 하도 웃어서 연분홍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초록색 눈동자가 눈물에 젖었다. 거짓으로 웃었고 진심으로 울었다. 내 사랑, 내가 산다는 건, 당신이 죽는다는 뜻이야. 당신이 이룬 모든 일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산산이 부서지고 당신의 적의 발에 밟혀서 결국엔 잔재조차 남지 않는다는 거야. 그러니까, 당신을 내 손으로 죽이느니, 내가 당신 손에 죽는 게 나아. 연화는 속으로 속삭이며 하나린을 향해 다시 한 번 살포시 미소 지었다. 배신자의 웃음이었고 연인의 웃음이었다.


-나린 언니.


날 죽여요. 지금 아니면 날 못 죽여.


후회, 그리고 후희. 얼마나 씁쓸하고 또 얼마나 달콤한가.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연화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눈물에 이지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연화는 침묵 한가운데를 걸어간다. 발걸음이 닿은 곳은 자신을 죽일 여자의 바로 앞, 그녀는 죽음까지 단 한 발을 남겨놓고 있다. 우아한 하얀 손을 끌어서 억지로 장전된 총을 쥐게 만든다. 배신감인지 슬픔인지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떨리는 손이 익숙하게 총을 잡았다. 하나린은 연화를 죽일 수 없지만 죽여야만 한다. 연화는 여전히 웃는다. 죽기 직전의 기분은 지독하게도 유쾌하다.


발걸음 단 한 발, 총알 단 한 발이면 죽는다. 우습게도 두렵다.


-언니. 언니야말로 왜 나를 믿었어요. 이 바닥에선 사람 믿는 거 아니라면서. 사랑은 좀 다를 줄 알았나 봐? 근데 어쩌죠. 그 사랑, 여기서 산산조각 나는데. 아, 내가 사랑한다고 속삭일 때마다 행복해하던 한 조직의 보스라니, 행복해하던 우스운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뭐 어쩌겠어.

-연화야.

-보스. 날 사랑했다면, 쏴요.


하나린은 머뭇거린다. 연화는 다시 한 번 손을 뻗는다. 가느다란 목숨줄을 기꺼이 끊으려 장전된 총을 쥔 하얀 손을 잡고 총구를 제 이마에 가져다 댄다. 조직의 보스답게 흐트러짐 없는 자세, 완벽 그 자체.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연화는 죽는다. 사랑한다 진심을 말할 순간조차 허락되지 않고 후회의 후희조차 마저 음미하지 못한 채로 심연으로 추락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제발 그 총으로 내 머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줘요. 날 죽음으로 인도하고 당신은 부디 살아요. 나를 잊어요. 아니 나를 잊지는 말아요. 눈을 마주하면 모든 진심을 후회없이 쏟아낼 것만 같아서 허공만을 응시한다. 뭐 해. 빨리 안 쏘고. 무덤덤하게 뱉어낸 죽음을 향한 재촉. 애를 쓰고 감정을 숨겨서 회색 문장을 토한다. 하나린이 눈을 감았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방아쇠를 당긴다. 총알이 발사된다. 탕.



후희, 그리고 후회. 딱 한 글자 차이가 어쩌면 이렇게 클 수 있는지. 연화야. 연화야. 내 연화야. 피 냄새 흥건한 복도에서 이제 죽어버린 사랑에게 입을 맞춘다. 눈에 빗물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하염없이 운다. 아. 어째서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입술은 이렇게 달고 어째서 서서히 싸늘해질 빈자리는 이렇게 씁쓸할까.



If you loved me, shoot me.